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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사법

[벌금제] #1 같은 죄에 같은 벌금을 매기는 '총액벌금제'의 함정

by 최룡 2020. 5. 15.

나라에 돈을 빼앗기는 고통

홍세화 선생님의 <결: 거칢에 대하여>를 읽고 벌금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공부해보기로 했다. 그 첫 번째는 우리나라에서 시행 중인 '총액벌금제' 다. 벌금제를 다루기 앞서 벌금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부터 알아보자. 벌금형은 과료, 몰수를 포함해 재산형에 속한다. 재산형의 정의는 이렇다.

재산형(財産刑)범죄자의 재산을 박탈하여 부과하는 형벌이다. 대한민국에서는 벌금, 과료, 몰수가 재산형이며 과태료, 범칙금은 재산형에 해당하지 않는다. 몰수는 부가형으로서 부과된다. 출처 위키피디아

 

말 그대로 재산을 '박탈'하는 형벌이다. 근본적으로 형벌은 위법 행위를 한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다. 벌금형은 재산을 빼앗는 것이 고통을 줄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거다. 이 부분은 타당하다. 빼앗은 금액만큼의 돈으로 누릴 수 있었던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벌금제는 어떨까

그러면, 우리나라 사법부가 벌금을 매기는 방식을 보자. 과잉형벌의 상징인 장발장은 절도로 잡혀 들어갔으니 절도를 예로 들어보겠다. 아래는 국가법령정보센터에서 찾은 절도죄의 처벌 규정이다.

제329조(절도) 타인의 재물을 절취한 자는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개정 1995. 12. 29.>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사회초년생인 나에게는 이 처벌이 꽤나 무겁게 느껴진다. 당장 학자금 대출도 못 갚고 있는데... 여러분은 어떤가? 애당초 돈 많은 분들이 이런 글을 읽을 리가 없으니 대부분은 무겁게 느끼실 게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자. 반포 자이에 사는 김갑부 씨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같은 물건을 훔쳤다고 가정해보자. (물론 갑부가 뭘 훔칠리는 없다만...) 그리고 똑같이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어떤가? 고통의 무게가 같다고 느껴지는가? 500만 원을 내야 감옥에 가지 않을 수 있는 상황이라면 대부분은 적금을 깨던 대출을 받건 해야 할 거다. 하지만 김갑부 씨는 별 감흥이 없을 거다. 괄호 안의 내용에도 불구하고 갑부가 물건을 훔친다는 얘기가 와 닿지 않는다면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사실 김갑부 씨는 20대다. 아직 예비군 5년 차라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한다. 옆동네 고시원에 사는 최고시 씨도 마찬가지로 예비군이다. 향토예비군설치법 제15조 제9항에 따르면 훈련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 혹은 1천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고 되어있다. 둘 다 예비군을 가지 않아 벌금을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고 생각해보자.

출처 한겨레

  어떤가? 김갑부 씨에게 벌금 300만 원은 선처로 느껴질 거다. 하지만 월 임대료가 30만 원인 고시원에 살면서 1,500원짜리 컵밥만 먹고사는 최고시 씨에게 300만 원은 10개월 치 월세고 2,000끼니! 밥 값이다. 이 둘이 느끼는 고통이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구에게 더 무겁게 느껴지는지 굳이 얘기해야 할까?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

 지강헌을 기억하는가? 나는 영화 홀리데이를 초등학생 때 봤음에도 그 외침이 아직 귀에 생생하다. 지강헌의 전과는 기껏해야 폭행, 절도 등이었다. 게다가 탈영 전의 재소 사유는 절도였는데, 560만 원어치를 훔치고 징역과 전두환 정부 때 만들어진 반인권적 악법인 '사회보호법'의 보호감호 조치로 총 17년(징역 7년, 보호감호 10년)을 살아야 했다.

  반면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600억 원을 횡령하고 고작 7년만 살면 되었다. 심지어 전경환은 2년 만에 풀려났다. 지강헌이 불만을 갖는 게 당연하다. 560만 원 절도 형량 17년 vs 600억 원 횡령 형량 7년. 공정한가? 지강헌의 옥살이는 1년에 329,412원(소수점 반올림)의 가치만을 갖고 전경환의 옥살이는 1년에 30,000,000,000원의 가치를 갖는다. 무려 91,071배다. 교도소에서 지강헌이 일을 했을까, 전경환이 일을 했을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여전히 유효하다. 3·5의 법칙이 대표적인 예다.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익숙하지 않은가? 현행법 상 징역이 3년 이하일 때만 집행유에를 선고할 수 있다. 1조 5천억 원대 회계분식 SK 최태원, 1천억 원 대의 비자금 조성 현대차 정몽구, 1,500억 원 대 배임과 400억 원 대 탈세 삼성 이건희. 모두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감자노인'은 감자 5알을 훔친 죄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았고, 내지 못해 지명수배를 당했다. 24601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의 수인번호다.

반지하 방에서 살며 빈 박스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던 중 주운 박스에 감자 5알이 들었다는 이유로 벌금 50만 원을 선고받은 '감자 노인(서울신문 기사 인용)', 아르바이트 사장이 임금을 주지 않아 끼니를 굶다가 마일리지 16,950원을 편취해 삼각김밥을 사 끼니를 해결한 죄로 벌금 70만 원을 선고받은 청년. 정말 아픈 우리네 모습이다.


내 생각

총액벌금제는 그 근본부터 잘못되었다. 전형적인 기계적 평등이고, 사법 불평등이다. 내가 주로 절도를 예로 들고 처벌이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고 해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게 죄가 아니라는 건 아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건 죄가 맞고,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정말 적절한 처벌이 이뤄지고 있는 문제인지는 생각해 볼 지점이라는 거다.

기사에 따르면 주유소에서 16,950원을 편취한 청년은 25세라고 한다. 신문 기사라 만 나이일 테니, 나와 엇비슷한 나이다. 저 청년이 70만 원을 내지 못해 감옥에서 노역을 살아야 한다면 도대체 그는 교도소에서, 또 벌금을 탕감하고 나와서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할까? '내가 70만 원을 내지 못해 25살에 감옥에 가야 한다면' 하고 생각해보니, 지강헌처럼 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싶었다. 저 청년이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느낄 패배감,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좌절감, 아무도 옆에 없다는 소외감은 도대체 누가 책임질 건가?>

소득 불평등이 형벌 불평등까지 이어지는 건 옳지 않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다음 글은 이에 이어 환형유치(換刑留置)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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