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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수필 · 에세이

[수필·에세이] #1 김영하 - 여행의 이유

by 최룡 2020. 6. 4.

<여행의 이유> 2019년 작. 김영하 저.


<여행의 이유> 표지 - 출처 교보문고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번에 리뷰할 책은 김영하 작가님의 <여행의 이유>다. 김영하 작가님은 <위대한 개츠비>의 번역자이기도 하고 <검은 꽃>, <살인자의 기억법>,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등의 저자다.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대상에서 <옥수수와 나>를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흔히 블랙 유머의 대가로도 일컬어지는데, tv 프로그램 <알쓸신잡> 시리즈에서 의도적으로 비딱한 태도를 보이는 점이 특히 인상깊었던 점이 기억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김영하 작가님에 대해 갖게 된 이미지는 이렇다. 사람의 의지로 뭔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힘을 믿는 사람. 어린 시절에 이사를 많이 다녀 뚜렷한 소속감은 없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 물론 책 2권 읽은 것 가지고 작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잦은 이사를 한 경험이 나와 비슷하고, 알쓸신잡에서의 모습도 평소 내가 자주 듣는 '넌 왜 그렇게 까칠하냐?'라는 말과 너무 잘 어울렸기에 이런 느낌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추방과 멀미],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오직 현재], [여행하는 인간, 호모 비아토르],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노바디의 여행], [여행으로 돌아가다]의 총 9개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챕터가 많으니, 인상깊었던 문장들을 가볍게 짚으면서 리뷰를 쓰도록 하겠다.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18-19p)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51p)

여행을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라 이 말이 꽤나 찔렸다. 항상 계획을 짜서 이동하고 '박물관 투어 데이'로 정한 날은 박물관만 죽자고 돌아다닌다. 이왕 간 거 뭐라도 얻고, 배우고 와야 하지 않겠냐는 마인드다. (같이 여행했던 친구와 이것 때문에 싸우기도 했다.)

작가는 이런 경험을 대학 시절 중국을 다녀오면서 겪었다고 한다. '독점재벌 해체하라'라고 외치던 그에게 어느날 그 자본으로부터 중국 여행 제의가 들어왔고, 자신이 동경하던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을 알고 싶어 윤리적 갈등 끝에 중국에 다녀왔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유학을 가고 싶은' 북경대 학생을 만났고, 지도자는 박정희와 같은 경제 정책을 모델로 삼고 있었으며 인민들은 믿을 수 없이 초라한 모습을 보며 '정신적 멀미'를 겪었다고 한다.

역시 낯선 곳에 선다는 건 먼 발치에서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주고 뭐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다. 하긴, 평소에 그다지 계획대로 살지 않는데 여행을 갔다고 해서 어떻게 계획적이겠는가. (친구야 미안하다.)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64p)

참 감성적인 말이다. 슬픔을 흡수한 물건들이라니. 사실 나는 이 말보다는 '리셋에 대한 희망(66p)'이라는 말이 더 좋았다. 도망보다는 희망이 더 좋지 않은가. 물론 리셋에 대한 희망도 도망이지만... 무튼 뜻하지 않은 상처들이 새겨진 집에서 탈출한다라는 말은 꽤나 위로처럼 다가온다.

다음으로 <알쓸신잡> 촬영과 관련된 얘기가 나온다. 출연자 각자가 다른 곳들을 여행하고 모여서 얘기하는 형식이다 보니 본인들은 일종의 카프카적 상황에 놓이게 되며 그를 통제하고 싶어하게 된다는 거다. 하지만 본인은 에피쿠로스, 스토아 학파의 입장에 가깝다고 한다. 현재를 즐긴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는 모든 여행에서 이런 태도를 택한다고 한다. (109p)>

이런 마음이 좋다. 어차피 어디 여행을 가도 모든 걸 다 볼 수도, 먹을 수도, 경험할 수도 없다. 이런 마음을 갖게 되면 세부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나는 지나치다시피 시작부터 세부적인 걸 따지기에 뭘 사는 데도 10번도 더 고민하고 일도 미룬다. 그런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발로 다녀온 여행은 생생하고 강렬하지만 미처 정리되지 않은 인상으로만 남곤 한다. (117p)

딱 이렇다. 여행은 작가의 말마따나 큰 그림으로 볼 순 없다. 타자의 시각과 언어를 통해 정리되어야 하진 않겠지만 내 경험에 타자의 경험이 얹어지면 훨씬 풍부해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책 리뷰를 쓰듯 여행기도 써야겠고, 또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필요하다고 느낀 지점이었다.


환대는 이렇게 순환하면서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그럴 때 진정한 가치가 있다. 준 만큼 받는 관계보다 누군가에게 준 것이 돌고 돌아 다시 나에게로 돌아오는 세상이 더 살 만한 세상이 아닐까. 이런 환대의 순환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게 여행이다. (147p)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136p)

  "나그네를 대접하기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히브리서 13장 2절이다. 앞서 프리뷰에서 내가 작가를 [사람의 의지로 뭔가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힘을 믿는 사람 ] 이라고 판단한 이유다. 나는 사람에 대한 불신, 그리고 엄청난 자존감 부족으로 내가 베풀면 베풀었지, 누군가의 환대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 문구를 통해 조금이나마 이런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내가 베푸는 만큼 그 사람도 누군가에게 베풀고, 나도 받은 만큼 베풀면 되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nobody일 뿐이다. (155p)

꼭 여행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정체성은 취약한 토대 위에 서있다. 주변 사람이 조금만 다르게 행동해도 어색함을 느끼고, 혼돈에 빠진다. 작가의 말처럼 작가는 '주로 어떤 글을 쓰'는지 설명해줄 필요가 없는, 즉 독자에게만 작가(168p)다. 이런 경우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허영과 자만을 경계하고 타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비로소 나 자신의 정체성을 굳건하게 한다.

어린 날의 내가 경험한 갑작스런 이주들. 겨우 사귄 친구들과의 반복된 이별. 나는 누군가와 오래 알고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 삶이 끝없는 이주일 때, 여행은 사치였다. (200-201p

작가는 이런 경험으로 인해 지금도 호텔 방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돈만 내면 정체성과 상관없이 누구든 환영해주기 때문이다. 어릴 때 이사를 많이 다니는 경우 오래된 친구가 없어 소위 '아싸'가 될 확률이 높다고 한다. 내가 딱 그렇다. 잠깐이라도 다닌 초등학교만 어림잡아 5곳은 된다. 사실 사람 바이 사람이겠지만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디서 왔는지 쉽게 규정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여행은 사치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205-206p)

 

하지만 작가는 일상을 여행으로 규정하며 내 공감을 깬다. 나는 지독한 집돌이다. 중요한 일이 아니면 밖에 안 나간다. 더이상 낯섦을 경험하고 싶지 않고, 일상이 깨지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차이는 여기서 발생했다. 경험의 차이일까? 시국이 진정되면 여행을 좀 다녀봐야겠다.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작가의 말처럼 나는 일상으로 돌아올 때보다 여행을 시작할 때 더 마음이 편해지니까.


이 책의 독특함은 여행과 관련된 글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이나 일러스트 하나 없다는 거다. 이상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상상력을 자극하고 작품에 쉽게 몰입하며 공감하게 해주었다. 또 왜 여행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계기도 되어주었다. 여행을 가고 싶게끔 만드는 책은 아니지만 '일상을 여행한다'는 말로 나를 위로해주긴 했던듯 싶다.

또 '환대'가 나오는 부분도 그렇고, '정신적 멀미'도 온통 공감가는 부분인지라 특히 그랬다. 늘 이상만 꿈꾸는 나에게 현실을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줬고, 또 세부에 함몰되지 말라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꼭 한 번 사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런 식의 독후감은 처음인지라 좀 횡설수설한 감이 없잖아 있다. 이 부분은 앞으로 꾸준히 보면서 수정해 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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